선행연구

족보와 과거시험에 관한 연구들과 방목자료의 가치를 살펴봅니다.

선행연구

본 연구는 족보데이터와 방목(조선시대 과거시험)데이터를 활용하였다. 이에 따른 선행연구는 크게 족보에 관한 연구, 과거시험에 관한 연구, 족보자료를 사용한 네트워크 분석 연구, 족보와 방목의 자료 가치와 한계점으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참고문헌의 목록을 정리하였다.

1. 족보에 관한 연구

(1) 우리나라의 성씨와 족보의 개념

먼저 우리나라의 성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삼한(三韓)과 삼국시대 왕공들의 후예가 남긴 토성(土姓)(정승모, 2005),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성씨와 중국식(漢式) 성씨의 수용과정, 고려시대의 토성(土姓)의 형성, 조선으로의 변환 가운데 일어난 신분의 재편성과 성관체제의 변동, 양반의 확대, 조선 후기를 거치며 양반사회의 몰락과 신분상승에 따른 성관의 변화 등을 이해해야 한다(이수건, 2003).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까지는 주로 왕이나 귀족들만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성씨가 매우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도 성씨의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보고 있으며 고려의 성씨는 이전부터 있던 성씨, 사성(賜姓, 왕이 하사한 성씨)에 의한 성씨, 중국에서 동래한 성씨가 있다(정승모, 2005). 특히 사성과 토성분정(土姓分定)은 우리나라 고유의 성관(姓貫) 제도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각 읍별로 분정 된 토성들이 외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분관이나 분파를 하였고, 그 결과 새로운 본관(本貫)이 형성되어 시조나 중시조가 발상(發觴)한 지명을 본관으로 표시하였다(정승모, 2005).

흥미로운 점은 15세기 후반부터 세분되었던 본관이 다시 통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가, 이후 동일 본관 내에서 분화가 다시 일어났다는 점이다. 15세기 후반부터는 한 성에서 여러 본관으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본관들이 하나의 성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같은 동성이라도 본관이 다른 이본이거나 본관이 같더라도 시조가 다르면 타성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동시에 생겨났다(정승모, 2005). 예를 들어 진주 류씨는 문화 류씨에서 분파된 토류(柳氏)와 외래한 이류(移流)간에 서로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배경에는 성씨와 본관 체계가 정착된 이후 타읍으로의 이동이 줄어들고 하층민의 신분 상승이 제한되는 등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정승모, 2005). 그 후, 18~19세기로 접어들면서는 같은 본관을 가진 성씨끼리는 합본하는 일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름난 조상을 중심으로 본관을 합치는 일이 풍속이 될 만큼 흔해져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450여개였던 본관이 19세기에 들어 200여개로 줄어들었다(정승모, 2005). 합본은 당시의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족보를 위조하는 위보 행위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현상으로 보인다.

한편, 본관과 성씨를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하였는데 족보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족보는 동족(씨족)이 그들의 시조로부터 현재(족보 편찬 당시)의 자손까지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최재석, 1983). 씨족의 관계를 정리한 기록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어느 수준의 가계기록을 족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족보의 개념은 유동적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족보는 계보관계를 도표 등 일정한 체계에 따라 기재하고 일개인의 직계 뿐 아니라 같은 친족집단의 구성원을 다수 증대한 기록물을 지칭한다(권기석, 2011). 또한 족보란 동일한 씨족 중에서도 본관을 중심으로 시조 이하 세대의 계통을 수록함과 동시에, 시조로부터 작성 당시의 친족 성원들에 이르기까지 선대들의 이름·호·행적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동족의 근원을 밝히고 세대의 순서를 알릴 목적으로 편찬한 서적이다(정승모, 2005). 족보란 대체로는 한 시조로부터 일정한 원칙에 의해 정해진 후손들을 가능한 넓은 범위로 망라하여 기록하는 것을 지향하고 여러 가족 단위들의 계보자료를 모아서 만든 기록이며, 이러한 족보는 15세기에 들어 처음 나타난다(노명호, 1999: 권기석, 2011에서 재인용). 그 후 족보가 본격적으로 양반사족층에 일반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이며 18~19세기에 이르면 양반가문의 문벌의식을 상징하는 기록물로서 확고히 자리잡기도 하였다(권기석, 2011).

족보의 근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제계(帝系)라는 제왕의 연표(年表)라고 볼 수 있으며, 사인(私人)에 의한 계보 기록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정승모, 2005). 중국 한나라가 망한 후 문벌의 전성기가 열린 위진남북조에 들어와서는 가계(家系)가 중요시되고 정부에서도 모든 집안의 보첩(譜牒)을 수집하여 심사한 후 등급을 매겨 구분하고 명문가가 아니면 고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보첩의 기록이 활발해졌다(정승모, 2005). 진나라에 들어선 4세기 이후에는 사대부들도 점차로 보첩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보첩에 의거하여 본격적으로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에 이르러서인데, 원래 송나라 이전에 족보는 제후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나 만들 수 없었지만 송나라에 이르러 특히 신유학으로 무장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였으며 강남농법에 의한 경제력 향상을 이룬 남송의 사대부들에 의해 그 원칙이 무너졌다(정승모, 2005). 흥미로운 사실은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16세기경부터 족보의 작성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2)족보의 사회사적 의미와 다양한 연구 활용 분야

족보를 편찬하는 작업은 단순히 혈연을 확인하는 기록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족보 편찬은 명목상으로 부모에 대해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근간으로 조상을 숭배하고 친족 간에 화목하고 조상의 덕망을 세상에 높이 드러내고 부계의 성을 중심으로 종통을 계승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부계사회의 사회유지와 통합을 위한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다(최양규, 2011). 그러나 명목상의 목적 외에 사회경제사의 입장에서 종족 조직을 강화시키는 목적, 즉 일정한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보유한 명망 있는 가문에서 종족 구성원의 기록을 공유함으로써 종족 의식의 확산과 공동체 유지를 위한 실질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최양규, 2011).

족보에 대한 논의는 족보의 수보(修譜, 족보의 편찬)를 주도하는 계층의 동향에 주목하는 연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족보는 양반문화의 상징으로 상층의 사족사회 위주로 제작되어 점차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졌으며 양반사족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와 자연스럽게 연계된다(권기석, 2011). 조선시대 족보의 편찬이 16세기 이후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대되는 이유는 중앙관료의 낙향과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통혼권의 확대와 경제력의 확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심승구, 2000: 권기석, 2011에서 재인용). 또한 집권사족층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혈통주의를 강화하려는 목적, 조상의 출신을 통해 가문을 현양하고 신분의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목적, 지배신분층간 경쟁과 도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목적, 지배층의 신분확인 욕구와 문벌의식의 확인, 양반문화의 모방과 족보의 위조를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하위계층의 시도 등 족보를 통해 사회사적 측면을 조망할 수 있다(권기석, 2011).

한편 족보 연구는 족보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 다른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호적자료와 함께 족보자료는 신분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며, 양반신분의 요건을 역으로 찾아내거나, 족보에 기재된 관직 기록을 통해 관료제 운영 체제를 탐색하거나, 과거의 개인정보로 활용하여 호적 등의 다른 고문서와 비교를 하거나, 과거 시점의 인구학적 연구를 위해 사용되거나,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한국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족보와 한국 족보를 비교하는 연구를 하기도 한다(권기석, 2011). 그 외에도 종합적으로 족보의 개념, 역사적 출현과 전개, 기록의 형식, 사료적 가치를 정리하거나, 이와 같은 계보기록의 양식과 성격의 변화를 통해 기록물 자체를 연구하는데서 한발 나아가 수보 과정에의 참여인물과 계층의 추이, 족보 간행의 추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권기석, 2011).

2. 과거시험에 관한 연구

(1) 조선 과거제도의 특성과 문과방목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제도는 통일 신라의 ‘독서삼품과’에서 시작하였으며 본격적인 과거제는 고려 956년(광중9) 쌍기의 건의에 의해서 도입되었다(원창애 외, 2014). 그러나 고려의 과거제는 왕이 직접 인재를 선발한다기보다는 귀족사회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조선의 과거 제도는 시험의 공정성을 더욱 확보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양인)에게 시험 기회가 주어지도록 하였다.

특히 과목으로 보면 문과, 무과, 잡과(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사마시(생원, 진사)로 구분하였으며, 시험시기로 보면 식년시와 증광시 외 다른 기타 시험을 실시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식년시는 식년이라 불리는 년도 즉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이다. 이는 고려 말 원나라 지배에 놓이면서 중국이 3년에 한번 시험을 보던 관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원창애 외, 2014). 증광시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개설하는 비정기시험으로 문과 중 급제 정원이 가장 많은 시험이다.

본 연구에서는 문과방목만 사용하여 다른 방목은 제외하고 문과방목에 관한 설명만을 하였다. 문과방목이란 조선의 문과 합격자 명단을 뜻한다. 문과 시험은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기 때문에 원래 각각의 방목이 작성된다. 그러나 초시방목과 복시방목은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보통은 최종합격자의 순위를 매긴 전체명단을 왕에게 재가 받은 전시방목을 문과방목이라 칭한다. 또한 이를 조선 왕대별로 정리하여 기록한 것을 국조문과방목이라한다. 곧 문과방목은 크게 단회방목과 국조방목으로 나눌 수 있는데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인용문에 소개되어 있다. 방목에 기록된 정보는 시험 실시 경위, 실시 날짜, 시제와 같은 ‘시험 정보’와 합격자 전력, 이름, 생년, 자, 본관, 생원, 진사시 합격 연도, 관직, 급제자 특기사항, 가족사항 등과 같은 ‘급제자 정보’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국조문과방목은 사후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급제자의 관직까지 기록되어 있다. 다만 가족사항 등과 생년월일 등은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원창애 외, 2014).

문과 방목은 문과 시험이 행해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단회방목(單會榜目)』과 조선시대 왕대별로 급제자를 종합 정리해 놓은 종합방목인 『국조방목(國朝榜目)』이 있다. 이 두 종류의 방목은 기재되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단회방목』에 기재된 내용은 시험에 대한 사항과 합격자 정보로 나누어진다. 시험에 대한 사항으로는 시험실시 경위, 시험 실시 날짜와 장소, 시제(試題), 은문(恩門)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말(卷末)에 방목색장(榜目色掌)의 명단과 장원한 글이 실려 있다. 합격자의 정보는 합격자와 가족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합격자에 대해서는 합격자의 전력, 이름, 생년, 자, 본관, 거주지, 생원·진사시 합격년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가족 사항은 부의 이름과 직역(職役), 부모 생존 여부, 형제 관계 등이다.

종합 방목인 『국조방목』은 왕대별 합격자를 정리한 것이다. 기록 사항은 시험 정보와 합격자의 정보이다. 시험에 대한 정보는 시험 실시 경위, 시험 실시 날짜, 시제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거나, 국조방목에 따라서 전혀 시험 정보가 누락되어 있기도 하다. 합격자 정보 주로 합격자와 가족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합격자에 대한 것은 합격자의 전력, 이름, 생년, 자, 본관, 생원·진사시 합격년도, 관직, 합격자의 특기사항 등이다. 가족사항은 기본적으로 부·조부·증조부·외조부·처부의 이름이 기재되고, 형제에 대해서도 기재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사항에 대한 누락된 정보가 많다. 국조방목에 합격자의 관직이 기록된 것은 합격 당시에 방목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왕조대의 합격자를 일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 사항의 대한 누락된 정보가 많은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국가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이 소실된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과방목해제' 에서 인용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과방목 해제를 참고하면 김영모, 송준호와 Wagner, 차장섭 등은 각종별시의 포함여부에 따라 문과 시험의 실시 횟수를 다르게 추산하고 있다.

각종 문과 시험의 실시 횟수는 연구자들에 따라 각각 다르다. 김영모(『조선지배층연구』, 1977)는 식년시 162회, 증광시 56회, 각종별시 571회로 보았다. 송준호와 Wagner는 식년시 163회, 증광시 68회, 각종별시 513회로 분류하였다. 차장섭(「조선전기 문과급제자 성분」,『조선사연구』3, 1994,「조선후기 문과급제자 성분」,『대구사학』47,1994)은 식년시 163회, 증광시 59회, 각종별시 523회로 하였다. 차이를 크게 보이는 것은 각종별시의 경우인데 중시의 별시 포함 여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증광시의 횟수 역시 증광시로 포함시킬 것인가 혹은 별시로 포함시킬 것인가에 따라 횟수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과방목해제' 에서 인용

(2) 조선 신분제와 양반

조선시대는 양천제(良賤制)를 바탕으로 한 신분사회이며 법률적 신분이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된다. 양인이란 자유민으로서 재산 소유, 교육, 과거시험 응시, 국방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반대로 천인은 양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한영우, 2012).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인은 여러 계층으로 나뉜다. 벼슬을 하여 양인의 최상층에 속하는 ‘사족(士族)’, 조선이 건국되며 토지와 관직을 몰수당했지만 조선의 포상을 받아 체제에 흡수되었던 ‘품관(品官) 또는 한량(閑良)’,신분은 평민이지만 관청에 소속되어 행정실무를 도왔던 ‘향리(鄕吏)’, 이 외에 벼슬을 갖지 못한 평민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분류하는 ‘서인(庶人)’으로 구분되었다(한영우, 2012).

앞에서 언급한대로 양인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관직을 하여 신분구조의 최상층에 오를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과거 합격 여부는 집안의 성쇠가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 자료를 비롯하여 그 외의 법전, 개인문집, 일기, 고문서 등 조선시대 자료에는 과거 시험에 관한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원창애 외, 2014).

한편 양반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로, 벼슬아치 곧 관인(官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천제도를 바탕으로 한 신분구조 안에서 양반은 벼슬아치를 의미하는 법률적 개념이었으나, 사회 관습적으로는 양반의 자제나 그 족친 또는 장차 벼슬아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재야의 선비들도 양반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한영우, 2012).


(3) 과거제도, 양반, 성관에 관한 논쟁점들

조선의 과거제도, 양반, 성관의 관계에 관하여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 조선의 과거시험을 통해 다양한 성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어 조선이 개방적인 사회였는지, 그렇지 않다면 특정한 성관의 소수 명문가 사람들만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이 폐쇄적인 사회였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먼저 방목자료만을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상위 약 200개 성관이 문과 급제자의 90%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 성관은 대략 3천개로 보는 것이 옳은데(한영우, 2012) 이 가운데 약 7퍼센트인 200개 성관이 문과 급제자의 90%를 배출했다는 점은 소수의 성관이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였음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조선사회를 폐쇄적인 사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한영우(2012)에 따르면 세종실록과 지리지에 기록된 토성2)의 종류는 1,200종에 달하며, 이들의 인구 자체가 많기 때문에 과거시험 합격자의 대부분이 이들 성관에서 배출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현상이다. 즉 양반으로 불리는 벼슬아치가 소수의 성관집단에서 배출되었다고 일반화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곧 한영우의 연구 아이디어와 분석 결과의 핵심은, 문과시험 합격자가 과연 특정 성관에 편중되어 있는지 살펴보려면 단순히 문과시험 합격자가 전체 성관에 비해 특정 성관에 집중되어 있는지 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관별 인구수의 효과를 통제하여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탐색하기 위해 보다 계량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각 성관별 문과시험 합격자와 2000년도 성관별 인구의 상관관계는, 빈도로 상관계수를 구하였을 경우 pearson cor =.341(p=.065), 순위로 상관계수를 구하였을 경우 spearman cor=.409(p=.025)이다. 이 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 성관별 인구가 현대의 성관별 인구에 비례한다고 가정한 경우, 인구가 많으면 문과시험 합격자도 어느 정도는 많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따라서 특정 가문 혹은 성관이 문과시험 합격자를 집중적으로 배출했다고 쉽게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성관별 문과시험 합격자 수와 성관별 인구수는 예상보다 낮은 수준의 상관관계(r=.341)를 보인다. 이는 특정 성관이 문과시험 합격자를 집중적으로 배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위의 상관계수를 구하는데 쓰인 자료는 문과시험 합격자 배출 상위 30위까지의 성관만을 선택한 자료로, 자료절단의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즉 추후의 연구에서는 전체 방목 자료와 전체 성관 인구자료를 결합하여, 인구수를 통제한 상황에서 과연 특정 성관이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는지 모형화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과방목해제는 조선 과거제도가 정기시험인 식년시보다 비정기시험인 별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별시의 빈도가 증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별시의 빈도가 증가하면서 양반관료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인용문에 소개하였다. 결국 조선의 과거제도가 모두에게 평등하여 개방적인 사회였는지, 평등하지 않아 폐쇄적인 사회였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태종대에 처음 실시되었던 비정기시험인 별시가 세조대부터는 거의 1년에 한번 꼴로 실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더욱 빈번히 별시가 실시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문과가 정기 시험인 식년시보다는 비정기적 시험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정기 시험은 태종대의 특수한 정치적인 상황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제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학(勸學)을 명분으로 세종 15년(1433)에 "정원에 구애받지 말고, 때때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법"이 제정되어서 특정 왕대에만 비정기 시험이 실시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실시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비정기 시험이 계속 실시되는 것은 식년시로 선발된 합격자로 관료의 수를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실상 식년시 급제자 33인 가운데 바로 실직(實職)에 제수되는 인원은 갑과 3인뿐이고, 나머지 30인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로 차정되거나, 차정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합격자 전원이 실직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식년시 급제자가 모두 관직에 제수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비정기문과가 계속 실시된 것은 양반 관료층의 신분 재생산과 연관이 있다. 비정기문과는 명조대 이전까지는 서울 거주자 대상으로 치루어졌고, 시험 방식도 식년시와는 달리 제술(製述)을 주로 하였다. 시험 절차를 보면, 시험 공고 기간이 짧고, 녹명(錄名)도 철저히 하지 않았다. 즉 비정기 시험은 녹명 절차 없이도 신분이 보장되는 일부 계층에 유리하다. 실제 비정기 시험 합격자의 성분을 보면, 이미 관직이나 관계(官階)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합격률이 식년시의 경우보다 10%이상 높다. 문과가 일반 양인에게까지 개방되어 있기는 하나 비정기 시험이 문과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결국 양반 관료층이 좀 더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과방목해제' 에서 인용

2)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토착기반으로 살아가는 성씨. 본관(本貫)과도 같은 개념. 이들은 토지와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기회가 많았다(한영우, 2012).

3. 족보자료를 사용한 연결망 분석 연구

김범준 교수님 팀 네트웍 연구 정리

Mi Jin Lee, Woo Seong Jo, Il Gu Yi, Seung Ki Baek, and Beom Jun Kim , Evolution of popularity in given names , Physica 443, 415 (2016) , arXiv:1510.03167

Sang Hoon Lee, Robyn Ffrancon, Daniel M. Abrams, Beom Jun Kim, and Mason A. Porter , Matchmaker, matchmaker, make me a match: migration of populations via marriages in the past , Phys. Rev. X 4, 041009 (2014), arXiv:1310.7532, bioRxiv, APS Synopsis, Science On (Korean)

Seung Ki Baek and Beom Jun Kim , Surname statistics - Crossing the boundary between disciplines Comment on ``Surname distribution in population genetics and in statistical physics'' by Rossi , Phys. of Life Reviews 10, 420 (2013), arXiv:1401.3718.

4. 족보와 방목의 자료 가치와 한계점

조선의 족보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가진 사료이다. 특히 가문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고, 과거시험 합격자의 정보도 담겨 있으며, 혼인관계의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이다.

문제는 모든 성씨가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개별 성씨의 모든 족보를 통합적으로 모아서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에 편찬된 족보와 최근에 편찬된 족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 ‘환부역조(換父易祖,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바꾸다)’라는 행위를 통해 족보를 위조하거나 다른 씨족의 족보에 자신의 가계를 집어넣는 등 신분상승이 활발해졌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문제가 있다(한영우, 2012).

방목은 그 자체로 과거시험 합격자의 전체명단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방목은 급제자의 이름과 벼슬, 전력, 성관, 내외 4대조의 이름을 적었을 뿐 조상의 벼슬이 기록되지 않아 양반의 후손인지 평민의 후손인지 알 수 없으며, 급제자의 벼슬, 성관, 내외 4대조 이름이 전혀 없거나 일부만 기록된 경우가 많아 신원파악이 어려운 급제자들이 많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한영우, 2012). 특히 방목자료의 분석을 통해 조선은 소수의 성관이 관직을 독점한 폐쇄적 사회였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방목자료만을 가지고는 문과 급제를 통한 신분이동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한영우, 2012).

5. 참고문헌 및 자료 목록

# 참고문헌 목록
  • 경주김씨판도판서공후 충암공계 회은공파 족보편찬위원회, 2007, (신체계 한글판) 경주김씨판도판서공파세보 : 충암공후 회은공파, 경주김씨판도판서공후 충암공계 회은공파 족보편찬위원회
  • 권기석, 2011, 족보와 조선 사회 : 15~17세기 계보의식의 변화와 사회관계망, 태학총서
  • 김정현, 2013, 김씨 성 이야기, 보고사
  • 박현순, 2014, 조선 후기의 과거, 소명출판
  • 뿌리착기운동본부, 1989, (자랑스런) 나의 족보, 뿌리
  • 새역사 역사편찬회, 2004, (한국인의)성씨와 족보, 온북스
  • 심승구, 2000, 조선초기 족보의 간행형태에 관한 연구, 국사편찬위원회
  • 원창애 외, 2014, 조선 시대 과거 제도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이성무 외, 2011,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글항아리
  • 이수건, 2006,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정복규, 2007, 한국의 성씨(1) 증보판, 이랑과 이삭
  • 정승모, 2010, 한국의 족보,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지두환, 2009, 왕실 친인척 부록: 총 목차 색인, 역사문화
  • 지두환, 2014, 왕실친인척과 조선정치사, 역사문화
  • 최양규, 2011, 한국 족보 발달사, 혜안
  • 최재석, 1983, 한국가족제도사연구, 일지사
  • 한국인의족보 편찬위원회, 1977, 韓國人의族譜, 일신각
  • 한국족보박불관, 2011, 혈맥을 그리다: 한국족보박물관 분파도 특별전, 효문화마을관리원
  • 한영우, 2013, 과거科擧, 출세의 사다리 :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 1(태조~선조 대), 지식산업사(이화학술원 지성사총서)
  • 한영우, 2013, 과거科擧, 출세의 사다리 :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 2(광해군~영조 대), 지식산업사(이화학술원 지성사총서)
  • 한영우, 2013, 과거科擧, 출세의 사다리 :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 3(정조~철종 대), 지식산업사(이화학술원 지성사총서)
  • 황규성, 1989, 명가의 족보(김씨-경주,김녕,의성)
  • Mi Jin Lee, Woo Seong Jo, Il Gu Yi, Seung Ki Baek, and Beom Jun Kim , 2016, Evolution of popularity in given names , Physica 443, 415
  • Sang Hoon Lee, Robyn Ffrancon, Daniel M. Abrams, Beom Jun Kim, and Mason A. Porter, 2014, Matchmaker, matchmaker, make me a match: migration of populations via marriages in the past , Phys. Rev. X 4, 041009
  • Seung Ki Baek and Beom Jun Kim, 2013, Surname statistics - Crossing the boundary between disciplines Comment on ``Surname distribution in population genetics and in statistical physics'' by Rossi , Phys. of Life Reviews 10, 420

# 웹자료 목록